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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가 딱 그렇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세월이 좀 지나고 다시 보니 그 답답함이 사실은 제 마음 안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절제된 사랑, 아름다운 건지 억압인지
영화 속 추와 수리첸은 각자의 배우자로부터 배신당한 뒤 서로에게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끝내 그 마음을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절제(節制), 쉽게 말해 감정을 스스로 억누르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절제가 <화양연화>에서는 미덕처럼 묘사되는데, 저는 영화를 보면서 여기에 조금 물음표를 달게 됐습니다.
사랑한다는 마음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감정을 억누른 이유가 순수하게 도덕적 판단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주변의 시선과 사회적 압력에 눌린 건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 홍콩이라는 시대적 배경, 좁은 아파트 복도, 항상 누군가가 엿볼 수 있는 공간 구조는 두 사람에게 사실상 감정 표현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환경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상황이 꼭 영화 속에만 있지는 않더라고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분위기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주변의 시선이 두렵다는 이유로 계속 삼키다 보면 나중에는 그 말을 꺼낼 타이밍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화가 그걸 너무 정확하게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의 절제를 낭만으로만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도 하나의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영화가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영리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왕가위 감독은 관객에게 정답을 주지 않습니다. 정답 없는 질문 앞에 관객을 세워두는 방식이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의미, 그 순간에는 몰랐던 것들
화양연화(花樣年華)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을 뜻하는 말입니다. 한자 그대로 풀면 꽃처럼 화사한 시절이라는 의미인데, 문제는 그 시절이 지나간 뒤에야 그게 화양연화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영화 속 두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밥을 먹고, 좁은 계단에서 스쳐 지나가고, 나란히 앉아 원고를 읽던 그 시간이 자신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음을 그들은 살고 있는 동안에는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 자체가 이 아이러니를 관객에게 천천히 각인시키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사랑보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오래 곱씹게 됐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게 된 거죠. 젊었을 때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는 생각 때문에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느끼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함께했던 평범한 저녁 식사, 친구와 아무 이유 없이 웃었던 날, 열심히 무언가에 매달리던 시절 같은 것들이 지나고 나서야 그게 나만의 화양연화였다는 걸 알게 됩니다.
영화 연구자들도 <화양연화>에 담긴 시간 감각에 주목합니다. 슬로모션(slow motion)으로 처리된 장면들, 즉 정상 속도보다 느리게 촬영해 감정의 밀도를 높이는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 사람의 시간 안에 함께 머물게 만듭니다. 이 기법 덕분에 관객은 두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짧은 순간조차 놓치지 않게 됩니다. 영화적 기법이 주제 의식과 이렇게 맞닿을 때 영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이 됩니다. <화양연화>가 2000년 칸 영화제에서 기술 대상(Grand Prix Technique)을 수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출처: 칸 영화제 공식 사이트)
놓친 마음, 그게 오래 남는 이유
말하지 못한 감정을 심리학에서는 미완결 과제(unfinished business)라고 부릅니다. 게슈탈트 심리학(Gestalt psychology)에서 나온 개념인데, 완결되지 못한 경험은 기억 속에서 완결된 경험보다 더 강하게,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이론입니다. <화양연화>가 보는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기억을 건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 영화가 사랑을 완성시키지 않고 열어두었기 때문에 관객은 그 빈자리에 자신의 미완결된 감정을 자연스럽게 채워 넣게 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는데, 하고 싶었던 말을 끝내하지 못한 관계는 정리된 관계보다 훨씬 오래 마음속에 남더라고요. 말로 매듭을 짓지 못했으니 기억 속에서도 끝이 없는 겁니다. 영화 속 차우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돌 틈에 마음을 묻고 오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끝내 말하지 못한 감정을 어딘가에 묻어두는 방식으로 스스로 마무리를 짓는 것인데, 과연 그게 진짜 마무리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화양연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배려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왜 지나간 뒤에야 보이는가
- 말하지 못한 감정은 어디에 남고, 어떻게 살아남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은 사실 사랑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간, 놓쳐버린 기회, 표현하지 못한 고마움까지 삶 전반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왕가위 감독이 사랑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삶의 태도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영화 연구자 데이비드 보드웰(David Bordwell)은 왕가위 영화의 특성으로 비선형적 시간 구조와 감정의 잔향을 꼽은 바 있습니다. 비선형적 시간 구조(non-linear narrative)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풀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전달하는 방식인데, <화양연화>에서 이 기법은 두 사람이 이미 지나쳐버린 시간을 관객이 함께 되새기게 만드는 효과를 냅니다.(출처: David Bordwell's Website on Cinema)
<화양연화>를 보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오늘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지나간 화양연화를 그리워하는 것과 지금의 화양연화를 알아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말하지 못했던 마음이 있다면 지금 꺼내는 것이 낫고, 소중한 사람 곁에 있는 오늘이 언젠가 돌아보고 싶은 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조용히 알려줍니다. 혹시 아직 <화양연화>를 한 번만 보셨다면, 5년 뒤에 한 번 더 보시길 권합니다. 분명히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될 겁니다.
참고: 영화 "화양연화" 를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