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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 영화를 보러 가면서 액션을 기대했다가 전혀 다른 감정을 안고 나온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날 영화관 밖으로 나오면서 한동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크린 속 총성과 추격보다 차가운 지하 공간에 갇혔던 한 여자의 표정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영화 제목인 '휴민트'가 그때서야 비로소 다르게 읽혔습니다.
줄거리, 블라디보스토크 낯선 도시에서 시작된 이야기
휴민트(HUMINT)란 인적 정보활동(Human Intelligence)을 뜻하는 첩보 용어입니다. 기술이나 장비가 아닌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는 방식으로, 냉전 시대부터 현재까지 각국 정보기관이 가장 오래, 가장 깊이 의존해 온 정보 수집 방법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저 낯선 단어였는데, 두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이 단어가 완전히 달리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합니다.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조인성)이 국제범죄의 단서를 쫓다가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와 접촉하고,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은 실종 사건을 추적하다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의 그림자에 점점 가까이 다가갑니다. 네 인물이 서로 다른 목적과 위치에서 얽혀드는 구조입니다.
저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북한이탈주민들의 정착 과정을 간접적으로 접한 경험이 있습니다. 수업 자료와 인터뷰 기록을 통해 그분들이 국경을 넘기까지 겪는 과정, 낯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고단함을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선화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단순한 영화 속 인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실제 삶을 겹쳐서 보고 있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공간 선택도 영리했습니다. 남도 북도 아닌 제3 국에서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마주하는 설정은 영화 전체에 깔리는 불안감을 더욱 짙게 만듭니다. 한쪽 발은 임무에, 다른 발은 사람에 걸쳐 있는 인물들의 긴장이 그 낯선 도시의 분위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인적 정보, 정보원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한 인간의 얼굴
첩보 분야에서 정보원(source)이란 작전 대상 측에 침투해 정보를 제공하는 인물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조직이나 국가를 위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내부 정보를 넘겨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이 단어 뒤에 숨어 있는 것들이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선화는 누군가에게 작전의 열쇠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며, 그 자신에게는 그저 살아남고 싶은 한 인간입니다. 낡은 건물의 어두운 지하 공간에 갇힌 그녀의 모습을 볼 때 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차갑고 습한 공간,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구조물 안에서 선화가 느꼈을 공포를 상상하자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습니다.
사회복지학에서는 사람을 바라볼 때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구조적 조건을 함께 보는 생태체계 관점(ecological systems perspective)을 강조합니다. 이 관점이란 한 인간의 행동과 선택이 개인의 의지만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 사회 제도, 국가 체계라는 중층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시각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그 수업 내용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선화가 처한 상황은 그녀가 나쁜 선택을 해서가 아니라 태어난 환경과 사회적 조건이 먼저 그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약 조직에 끌려온 여성들의 장면도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단순히 영화적 설정으로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결정되는 상황, 그 공포와 무력감은 스크린 밖에서도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현실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박정민이 연기한 박건은 처음에는 냉정하고 단단한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쌓일수록 조직의 명령과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는 내면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저는 그 장면들에서 '사람은 아무리 단단한 척해도 결국 사랑하는 것 앞에서 무너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경험상, 가장 강해 보이는 사람이 사실 가장 많은 것을 지키려 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 국가와 조직의 목적은 한 개인의 삶과 존엄보다 앞설 수 있는가.
- 정보원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사람의 두려움과 희생은 어디로 가는가.
-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믿는 선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사랑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에 국경이 존재하는가.
영화는 이 질문들에 명쾌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 열린 결말 때문에 오히려 영화관을 나온 뒤에도 생각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직접 겪어보니 정답을 주지 않는 영화가 더 오래 남는다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존엄, 차가운 현실 속에서 사랑이 더 선명해지는 이유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 예를 들면 베테랑이나 모가디슈와 비교했을 때 이번 휴민트는 액션의 강도보다 인물의 내면을 좀 더 길게 들여다보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액션 장면 자체는 충분히 강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영화관을 나오고 사흘이 지나도록 기억하는 것은 폭발 장면이 아니라 선화의 눈빛과 박건이 망설이던 그 몇 초였습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무력 충돌 상황에서도 민간인의 존엄과 인도적 처우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제 첩보전이나 국가 간 갈등 상황에서 개인이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는 국제적십자위원회 공식 홈페이지에서 관련 보고서를 통해 더 깊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실제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가 묘사한 내용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첩보 작전에서 자산 보호(asset protection)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는 작전 수행 중 정보원 또는 협력자의 신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뜻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산 보호가 언제나 최우선 순위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 그것이 이 영화가 불편하게 건드리는 지점이었습니다. 조 과장이 선화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저는 그 불편함을 구체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게 다가온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의심과 계산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고개를 드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차가운 배경이 있었기에 그 온기는 더 크게 느껴졌고, 두려움과 폭력이 깔려 있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더 선명해졌습니다. 저는 그 대비가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이탈주민 정착 지원과 관련한 실제 현황은 "https://www.unikorea.go.kr" 통일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그 자료들을 들여다봤을 때 느꼈던 무게감이 영화 속 선화를 보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제 경험상 이렇게 공부한 내용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되살아날 때 그 울림은 두 배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는 한 가지 문장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결국 가장 강력한 정보도 사람에게서 나오고, 가장 어려운 선택도 사람이 한다는 것. 휴민트라는 단어가 그렇게 다시 읽혔습니다.
화려한 액션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저처럼 인물의 관계와 선택을 따라가며 영화 속에서 사람의 이야기를 찾고 싶으신 분이라면,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층위에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선화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제대로 건드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영화 : "휴민트"